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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정리 아카이브

8·15 광복을 맞이하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으로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광복은 곧바로 독립 국가로 이어지지 않았다. 한반도는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에 미군, 북쪽에 소련군이 들어오는 분할 점령 상태에 놓였고, 새 나라를 어떤 모습으로 세울지를 두고 길고 격렬한 다툼이 시작되었다.

스스로 정부를 세우려는 움직임

광복 당일 여운형과 안재홍 등은 여러 성향의 민족 운동 지도자들과 함께 조선 건국 동맹을 기반으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건준)를 조직했다. 조선 총독부가 일본인의 안전을 요구해 오자 여운형은 그 대가로 정치범 석방, 식량 확보, 치안 유지와 건국을 위한 정치 활동의 자유를 약속받고 이를 받아들였다. 통치 공백을 우리 손으로 메우려 한 것이다.

미군의 한반도 진주가 결정되자 건준은 정부로 인정받기 위해 조선 인민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각 지부를 지방 인민 위원회로 개편했다. 그러나 이 선포는 미군정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미군정이 내린 결정들

미군은 1945년 9월 초에 들어왔다. 주한 미군 사령관은 조선 총독부를 접수하면서 총독부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관료와 경찰을 그대로 일하게 했다. 친일 세력을 처벌해야 한다는 한국인의 뜻과 정면으로 어긋나는 결정이었고, 이 어긋남은 이후 친일 청산 문제의 출발점이 되었다.

미군정은 조선 인민 공화국도, 대한민국 임시 정부도 인정하지 않고 ‘미군정만이 38도선 이남의 유일한 정부’라고 선언했다. 이어 각 지방에 조직된 인민 위원회를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해산했다.

경제 운영도 순탄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식량과 생활필수품 확보, 원조를 통한 물자 수급의 균형을 꾀했지만, 재정 적자를 메우려 화폐를 지나치게 발행해 물가가 올랐다. 쌀값 폭등을 막으려 식량을 수집하고 배급을 통제했고, 노동자와 농민의 생활은 오히려 어려워졌다.

38도선 북쪽에서는

소련군은 1945년 8월 말까지 일본군을 무장 해제하며 북한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소련군은 인민 위원회의 자치를 인정한다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좌파가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배후에서 지원했다. 소련령에서 활동했던 김일성이 후원을 받았고, 국내에서 활동해 온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주의 세력은 점차 힘을 잃었다.

남과 북에서 서로 다른 세력이 주도권을 쥐어 가는 동안, 한국인들은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폭이 좁아지고 있었다.

좌우 대립을 격화시킨 회의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했어도 여운형과 건준의 영향력은 작지 않았다. 송진우와 김성수 등 우파 세력은 건준을 비판하며 한국 민주당을 결성하고 미군정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해 온 박헌영은 조선 공산당을 재건해 좌파 세력을 모았다. 국외의 독립운동가들도 돌아왔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귀국했고,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도 귀국했다.

1945년 12월 미국·영국·소련의 외무 장관이 전후 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모였다(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이 회의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미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하며, 정식 정부를 세울 때까지 최고 5년의 신탁 통치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국내에는 회의의 전체 내용이 아니라 ‘신탁 통치’라는 이름만 부각되어 알려졌다. 김구를 비롯한 임시 정부 세력이 즉각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벌였고 이승만과 우파 세력이 가담했다. 좌파 세력도 처음에는 반대 운동에 참여했으나, 임시 정부 수립이 불가피하다고 보아 결정을 지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북한 지역의 사회주의 정당과 단체들도 결정을 지지했다. 이 회의를 둘러싸고 좌우 대립은 크게 격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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