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다
임시 정부를 세우기 위한 협의는 두 차례 열렸다가 모두 깨졌다. 그 사이 남한만의 정부를 세우자는 주장과 통일 정부를 세우자는 주장이 맞섰고, 결과적으로 남북에 각각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미소 공동 위원회와 정읍 발언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에 따라 1946년 3월 서울에서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열렸다. 회의는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한 협의에 어떤 단체를 참여시킬지를 두고 대립했다. 미국과 소련이 각각 자신들에게 유리한 단체를 넣으려 했고, 서로의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 결렬되었다.
결렬 직후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세우자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정읍 발언). 분단을 전제로 한 이 주장은 이후 정치 지형을 크게 갈랐다.
좌우 합작 운동
단독 정부 수립 논의가 분단으로 이어질 것을 걱정한 중도파 여운형과 김규식은 좌우 합작 위원회를 결성했다. 위원회는 미소 공동 위원회의 재개와 남북 통합 임시 정부 수립, 토지 개혁과 친일파 청산 등을 담은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했다(1946. 10.).
그러나 바로 그 토지 개혁과 친일파 청산에서 좌우파의 의견이 충돌했다. 7원칙은 토지를 몰수·유조건 몰수·체감 매상 등으로 회수해 농민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줄 것을 담았는데, 이 방식을 두고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운형이 암살되고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마저 결렬되면서 좌우 합작 운동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유엔으로 넘어간 문제와 남북 협상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했다. 유엔 총회는 남북한 인구 비례에 따른 총선거 실시를 결정했으나, 이를 위해 파견된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은 소련의 반대로 북한 지역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후 유엔 소총회는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 먼저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했다. 남한만의 선거가 확정된 것이다.
김구와 김규식 등은 통일 정부를 세우려 남북 협상을 추진했다. 1948년 4월 두 사람 일행은 각각 38도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김일성·김두봉과의 회담에서 남북 양측은 외국 군대 철수, 내전 반대, 통일 정부 수립 등을 결의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이미 선거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고, 이 결의는 실현되지 못했다.
5·10 총선거와 정부 수립
1948년,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보통 선거가 실시되었다(5·10 총선거). 이 선거로 구성된 제헌 국회는 나라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헌법을 공포했다(1948. 7. 17.). 제헌 헌법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을 계승한다고 선언했고, 민주 공화국임을 명시하며 경제적 균등을 지향했다. 제헌 국회는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을 선출했고,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1948. 8. 15.).
선거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김구와 김규식 등 민족주의 진영의 많은 인사가 남한 단독 선거에 반대해 출마와 투표를 거부했다.
제주 4·3 사건과 여수·순천 10·19 사건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제주 지부를 중심으로 단독 정부 수립 반대 등을 주장하는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이전부터 쌓여 있던 미군정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겹쳐 대규모 항쟁으로 번졌다. 미군정은 경찰과 서북 청년단을 동원해 무자비하게 탄압했고, 1948년 봉기 이후부터 정부 수립 뒤인 1954년까지 중산간 마을 주민 등에 대한 학살이 이어졌다.
이승만 정부는 같은 해 10월 여수에 주둔한 군대에 제주 출동을 명령했다. 그러자 일부 군인들이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봉기했다(여수·순천 10·19 사건).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해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제주도민들의 오랜 진상 규명 노력 끝에 2000년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이어진 조사에 따르면 당시 희생자는 3만 명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