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잔재 청산을 위해 노력하다
새 정부가 마주한 첫 과제는 식민지가 남긴 것을 어떻게 정리할지였다. 사람(친일 세력)과 땅(지주제), 그리고 일본인이 남긴 재산이 그 대상이었다. 세 가지 모두 시도되었으나, 그 결과는 애초의 요구와 상당히 달랐다.
친일 청산의 시작과 좌절
제헌 국회는 헌법에 친일 청산을 규정했고, 압도적인 찬성으로 반민족 행위 처벌법(반민법)을 제정했다(1948. 9.). 이어 김상덕을 위원장으로 하는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반민 특위)를 구성해 활동을 시작했다(1948. 10.).
그러나 반민 특위는 오래가지 못했다. 정부의 공세가 이어지는 가운데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일부 국회 의원이 체포되었다. 국회 의원 일부를 간첩 혐의로 체포·기소한 이 사건에는 친일파 청산에 앞장선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국회는 반민법의 시효를 단축했고 반민 특위는 해체되었다.
미군정이 총독부에서 일하던 한국인 관료와 경찰을 그대로 근무하게 한 결정이 이 좌절의 배경에 있다. 청산해야 할 사람들이 이미 국가 기구 안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지 개혁 — 유상 매수, 유상 분배
국회는 제헌 헌법에 따라 1949년 농지 개혁법을 제정했다. 정부는 다음 해부터 개혁을 시작해 지주에게서 농지를 매수한 뒤, 매수한 농지와 국가 소유의 농지를 유상으로 분배했다. 「유상 매수, 유상 분배」가 이 개혁의 방식이다.
이 방식은 좌우 합작 7원칙이 담았던 「무상 분여」와 다르다. 농민이 땅값을 부담해야 했다는 뜻이고, 이 차이가 개혁의 성격을 가른다. 그래도 지주가 토지를 독점하던 구조는 크게 흔들렸다.
적산인가 귀속 재산인가
한국인들은 일본인이 남기고 간 기업체·토지·가옥 등을 ‘적들이 남기고 간 재산’이라는 뜻으로 적산이라 불렀다. 그것이 우리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재산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고 계획 경제로 국민 경제를 일으키자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미군정은 적산을 ‘귀속 재산’이라는 용어로 바꾸고, 소규모 사업체를 미군정과 가까운 개인에게 매각했다. 부르는 이름이 바뀌면서 처리 방식도 바뀐 것이다. 규모가 큰 사업체를 넘겨받은 대한민국 정부도 개인에게 매각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승만 정부는 귀속 재산 처리법을 만들어 귀속 재산을 민간인에게 매각했다. 규모 있는 기업들이 귀속 사업체였으므로, 이를 매수한 기업가는 이후 재벌로 성장할 수 있었다. 식민지가 남긴 재산이 누구에게 갔는지가 이후 한국 경제의 구조를 상당 부분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