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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정리 아카이브

6·25 전쟁, 한국인의 삶을 파괴하다

6·25 전쟁은 3년 넘게 이어지며 전선을 남북으로 여러 차례 밀어 올리고 내렸다. 군인의 희생도 컸지만 민간인의 피해가 더 컸고, 전쟁이 끝난 뒤 남은 것은 통일이 아니라 굳어진 분단이었다.

전쟁 전의 한반도

38도선 부근에서는 군사적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1950년 1월 미국 국무 장관 애치슨은 소련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한 태평양 방어선을 발표했다(애치슨 라인). ‘알류샨 열도, 일본과 오키나와, 필리핀 군도’로 이어지는 이 선에 한국과 타이완은 포함되지 않았다. 다만 미국이 대한민국과 타이완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철회한 것은 아니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밀리고 올라가고 다시 밀린 전선

북한군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곧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둔 전투에서 남북한의 많은 군인이 희생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 상륙 작전으로 서울을 되찾고 38도선을 넘어 압록강으로 향했다. 그러자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전쟁은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중국군의 참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해 서울을 다시 빼앗겼다(1·4 후퇴). 이후 전열을 정비해 서울을 되찾고, 지금의 군사 분계선 일대에서 공산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민간인이 겪은 전쟁

전쟁 중 양측 군대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전선이 남과 북으로 오가면서 상대방에 협조했던 사람들에 대한 보복이 벌어졌고, 충북 영동 노근리에서는 피란민들이 미군에 의해 학살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1949년 정부가 사회주의 활동을 한 사람들을 계몽·지도한다는 이유로 만든 단체가 국민 보도 연맹이다. 전쟁이 터진 뒤 이 명부는 학살의 근거로 쓰였다.

폭격으로 남북한의 산업 및 기간 시설, 학교, 도로, 다리가 파괴되고 농지도 황폐해졌다. 수많은 전쟁고아와 이산가족이 생겼다.

정전 — 협상 중에도 계속된 전투

정전 협상이 진행된 2년 동안에도 전투는 멈추지 않았다. 협정이 체결되는 순간 양측이 대치하고 있는 선을 군사 분계선으로 정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려는 폭격과 고지전이 이어졌다. 전쟁 말기에 오히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이유가 여기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 반대 성명을 발표했고, 정전 회담 반대 궐기 대회와 시위가 열렸다. 그렇게 논쟁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전선에서는 사람이 죽고 있었다.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공산군 측은 군사 분계선을 설정하고 정전 협정을 체결했다. 종전이 아니라 정전이었다.

전쟁이 남긴 것

정전 협정 체결 직후 한국과 미국은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맺어 미군을 한반도에 계속 주둔시켰다. 전쟁이 끝난 뒤 군비 경쟁은 오히려 가속되었다.

전쟁을 거치며 남과 북에서 민주주의와 다원주의적 정치 지형이 좁아졌다. 이승만은 반대파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제거했고, 북한의 김일성은 남로당 출신 정치인들에게 전쟁 실패의 책임을 물어 숙청했다. 남북한 사람들은 서로를 불신하고 적대하게 되었고, 이는 분단의 고착으로 이어졌다.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도 재편되었다. 중국은 참전해 미국과 대결하면서 공산주의 진영에서 위상이 높아지고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키웠다. 미국은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었고, 일본은 전쟁 특수에 힘입어 전후 경제 침체에서 벗어나 아시아의 반공 거점 국가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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