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으로 민주주의가 확대되다
1960년 봄, 학생과 시민이 부정 선거에 맞서 거리로 나섰고 결국 12년을 이어 온 정권을 물러나게 했다. 우리 역사에서 시민의 힘으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첫 민주 혁명이다.
처음부터 정해진 선거 — 3·15 부정 선거
1960년 3월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승만의 당선은 확실했지만, 고령의 대통령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부통령이 자리를 잇게 되어 있었다. 정부와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려고 미리 표를 채워 넣는 사전 투표, 몇 사람씩 묶어 서로 감시하게 한 공개 투표 같은 부정을 조직적으로 준비했다.
선거 전부터 반발은 시작되었다. 2월 28일 대구에서는 야당 유세에 가지 못하게 일요일 등교를 강요받은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다. 3월 15일 선거는 예상대로 부정으로 치러졌다.
마산에서 경무대까지
선거 당일 마산에서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나자 경찰이 총을 쏘아 여러 사람이 숨졌다(3·15 의거). 4월 11일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신은 분노를 전국으로 번지게 했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마치고 돌아가다 정치 깡패에게 습격당했고, 다음 날 서울의 중고등학생과 대학생, 시민 수십만 명이 경무대로 향했다. 경찰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났고 정부는 비상계엄을 선포했지만 시위는 오히려 커졌다.
4월 25일 대학교수들이 시국 선언을 발표하며 행진에 나서자 흐름은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이승만은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내고 물러났으며, 얼마 뒤 하와이로 망명했다.
내각 책임제와 장면 내각
허정 과도 정부를 거쳐 1960년 6월 대통령 중심제를 없애고 내각 책임제와 민의원·참의원의 양원제를 담은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7월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크게 이겨 윤보선이 대통령, 장면이 국무총리가 되었고 실권은 장면 내각이 쥐었다.
장면 내각은 경제 제일주의를 내세워 경제 개발 계획을 세우고 국토 건설 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민주당 안의 신파와 구파가 갈라서는 등 정치 기반이 흔들렸다.
분출한 요구, 짧았던 봄
억눌렸던 요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학생들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치며 남북 학생 회담을 제안했고, 교원 노동조합 운동도 일어났다. 장면 내각은 유엔 감시 아래 총선거라는 기존 통일 방안을 고수하며 민간의 통일 운동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 봄은 1961년 5월 16일 군사 정변으로 끝났다. 그러나 4·19 혁명은 이후 민주화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고, 지금의 헌법 전문은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잇는다고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