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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정리 아카이브

5·16 군사 정변으로 민주주의가 후퇴하다

4·19 혁명이 연 민주주의는 1년 만에 군인들의 총칼 앞에 멈췄다. 이후의 1960년대는 경제 성장과 권력 집중이 함께 진행된 시기였다.

5·16 군사 정변과 군사 정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비롯한 일부 군인들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이들은 반공을 국가 정책의 으뜸으로 삼고 일을 마치면 민간에 정권을 넘기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비상계엄을 선포해 장면 내각과 국회를 해산하고, 국가 재건 최고 회의를 만들어 입법·행정·사법의 권력을 모두 쥐었다. 의장은 박정희였다.

군사 정부는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정보 정치의 기틀을 놓았고, 1962년 대통령 중심제와 단원제 국회를 담은 헌법을 국민 투표로 통과시켰다. 민정 이양 약속과 달리 박정희는 비밀리에 준비한 민주 공화당 후보로 1963년 대통령 선거에 나서 근소한 차이로 당선되었다.

한일 협정과 6·3 시위

경제 개발 자금이 필요했던 정부와 한·미·일 협력을 원한 미국의 이해가 맞물려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가 추진되었다. 그러나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와 배상 없이 협상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학생과 시민들은 「굴욕 외교」라며 반대했고, 시위는 1964년 6월 3일 절정에 이르렀다. 정부는 비상계엄으로 이를 눌렀다.

1965년 한일 기본 조약과 청구권 협정 등이 체결되었다. 일본은 무상 3억 달러와 유상 2억 달러 등의 자금을 제공했지만 조약 어디에도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와 배상은 적히지 않았다. 강제 동원 피해자 문제처럼 그때 매듭짓지 못한 일들이 지금까지 한일 갈등으로 이어진다.

베트남 파병

베트남 전쟁이 커지자 미국은 한국에 파병을 요청했다. 정부는 1964년 의료 지원단을 시작으로 이듬해부터 전투 부대를 보냈고, 1973년 철수할 때까지 연인원 30만 명이 넘는 군인이 참전했다. 미국은 그 대가로 군사 원조와 차관을 약속하고 한국 기업의 현지 사업 참여를 보장했다.

군인들의 송금과 군수 물자 수출, 건설 사업으로 외화가 들어와 경제 성장에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많은 군인이 죽거나 다쳤고 고엽제 피해자도 생겼다. 베트남 민간인 피해와 한국계 혼혈인 라이따이한 문제는 아직 풀어야 할 과제다.

경제 개발과 3선 개헌

정부는 제1, 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2~1971)으로 섬유, 신발 같은 노동 집약적 경공업과 시멘트, 정유 같은 기간 산업을 키우고 수출에 힘을 쏟았다. 1970년 개통한 경부 고속 도로는 물자 수송의 동맥이 되었다. 성장의 바탕에는 저임금 노동이 있었고, 1970년 평화 시장의 재단사 전태일은 근로 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치며 스스로 몸을 불살랐다.

1967년 재선된 박정희는 세 번째 출마를 위해 헌법을 고치려 했다. 1968년 북한 특수 부대의 청와대 습격 사건 뒤 향토 예비군이 창설되는 등 안보 분위기가 높아진 가운데, 1969년 여당 의원들은 국회 별관에 따로 모여 새벽에 3선 개헌안을 변칙으로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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