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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정리 아카이브

유신 헌법을 선포하다

1970년대 초 냉전이 잠시 누그러지자 남과 북은 처음으로 마주 앉았다. 그러나 화해의 몸짓은 곧 남과 북 모두에서 권력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데 쓰였다.

데탕트와 7·4 남북 공동 성명

1969년 미국 대통령 닉슨은 아시아의 분쟁에 미군이 직접 개입하지 않겠다고 밝혔다(닉슨 독트린). 미국은 중국과 가까워졌고, 주한 미군 일부도 철수했다. 동아시아의 긴장이 풀리자 박정희 정부도 대결 위주의 대북 정책을 고쳤다.

1971년 이산가족 찾기를 위한 남북 적십자 회담이 추진되었고, 1972년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었다.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이라는 통일의 3대 원칙이 담겼고 남북 조절 위원회도 만들어졌다.

10월 유신과 유신 헌법

공동 성명 석 달 뒤인 1972년 10월, 박정희 정부는 평화 통일을 위한 체제 정비를 내세워 「10월 유신」을 선언했다.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활동을 막은 채 전국에 비상계엄을 폈으며, 비상 국무 회의가 만든 헌법을 국민 투표로 확정했다. 같은 해 북한도 새 헌법으로 주석 김일성에게 권력을 모았다.

유신 헌법에서 대통령은 통일 주체 국민 회의가 6년마다 간접 선거로 뽑았고 연임 제한이 없었다. 대통령은 국회 의원의 3분의 1을 사실상 지명하고 국회를 해산할 수 있었으며, 긴급 조치로 국민의 기본권을 정지시킬 수 있었다. 입법·행정·사법을 대통령이 모두 쥐는 구조로, 삼권 분립이 무너졌다.

중화학 공업화

정부는 1973년 중화학 공업화를 선언하고 제3, 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72~1981)에서 철강, 조선, 기계, 석유 화학 등을 집중 육성했다. 포항, 울산, 창원, 여수 등에 대규모 공업 단지가 들어섰고, 1977년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했다.

1973년 제1차 석유 파동이 닥쳤지만 기업들이 중동 건설 현장에서 외화를 벌어들이며 고비를 넘겼다. 정부가 금융과 세제로 특정 기업을 밀어주면서 대기업 중심의 경제 구조도 이때 굳어졌다.

산업화의 그늘

도시가 커지며 정부는 판자촌을 철거하고 주민을 외곽으로 옮겼다. 1971년 경기도 광주(지금의 성남)로 강제 이주된 주민들은 기반 시설도 일자리도 없는 현실에 맞서 들고일어났다(광주 대단지 사건).

농촌은 저곡가 정책으로 어려워졌다. 정부는 1970년부터 농어촌 근대화와 소득 증대를 내건 새마을 운동을 펼쳤고, 운동은 곧 도시와 직장으로 번졌다. 공업 단지 주변에서는 대기와 바다가 오염되는 공해 문제가 심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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