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향한 열망, 유신 독재를 무너뜨리다
유신 체제는 반대를 법으로 금지했지만 저항은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대학생이, 이어 재야와 종교계, 언론인, 농민과 노동자가 차례로 목소리를 보탰고, 그 힘이 결국 체제를 안에서부터 흔들었다.
학생과 재야의 저항, 긴급 조치
1973년 대학가를 중심으로 유신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그해 말 장준하 등 재야인사들이 시작한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은 열흘 만에 30만 명을 넘었다. 정부는 1974년 1월 긴급 조치 1호를 선포해 헌법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도 영장 없이 처벌할 수 있게 하고 운동의 중심인물들을 잡아들였다.
같은 해 정부는 전국 민주 청년 학생 총연맹(민청학련)이 정부를 뒤엎으려 했다며 학생들을 비상 군법 회의에 세웠고(민청학련 사건), 그 배후로 인민 혁명당 재건 위원회를 조작했다. 1975년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8명의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이들은 2007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종교계와 언론
민청학련 사건으로 지학순 주교 등 성직자들이 구속되자 종교계가 본격적으로 나섰다. 천주교 신부들은 1974년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을 꾸려 시국 기도회를 열었고, 개신교계는 해외 교회와의 연결망을 통해 한국의 인권 상황을 세계에 알렸다.
1976년 3월 1일 재야인사와 종교인, 야당 정치인들이 명동 성당에서 3·1 민주 구국 선언을 발표해 긴급 조치 철폐와 정권 퇴진을 요구했다. 언론에서도 기자들이 자유 언론 실천 선언을 내걸었고, 광고주들이 압력으로 광고를 거둬 지면이 비어 나간 신문을 시민들이 격려 광고로 채우기도 했다.
농민과 노동자
1976년 전남 함평에서는 농업 협동조합이 고구마를 사들이겠다는 약속을 어겨 농가가 큰 피해를 입었다. 농민들은 3년에 걸친 끈질긴 싸움 끝에 보상을 받아 냈고, 이 투쟁은 농촌 정책의 실상을 드러냈다. 공장에서도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맞선 노동자들의 싸움이 이어졌다.
무너지는 유신 — YH 무역 사건에서 10·26까지
1978년 국회 의원 선거에서 야당 신민당이 득표율에서 여당 공화당을 앞질렀다. 같은 해 제2차 석유 파동이 닥치자 빚과 수출에 기대 급성장한 중화학 공업이 흔들렸고, 물가는 뛰고 성장률은 떨어졌다. 경제의 위기가 곧 정권의 위기가 되었다.
1979년 8월 회사의 부당한 폐업에 맞서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던 YH 무역 여성 노동자들을 경찰이 강제 해산하는 과정에서 한 노동자가 숨졌다. 정부를 강하게 비판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국회에서 제명되었다.
10월 김영삼의 정치적 기반인 부산과 마산에서 학생과 시민이 들고일어났다(부마 민주 항쟁). 정부는 비상계엄과 위수령으로 공수 부대까지 투입했지만 대응을 두고 권력 내부가 갈라졌고,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를 쏘아 숨지게 했다. 유신 체제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