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 통치가 시작되다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대한 제국의 국권을 강제로 빼앗았다(경술국치). 통치 기구로 조선 총독부를 두고, 그 정점에 총독을 앉혔다. 총독은 일본 현역 육·해군 대장 중에서 임명되었으며 입법·행정·사법과 군 통수권까지 한 손에 쥐었다. 견제받지 않는 절대 권력이 식민지 통치의 출발점이었다.
헌병 경찰을 앞세운 무단 통치
1910년대 통치는 흔히 ‘무단 통치’라 불린다. 군대의 경찰인 헌병이 일반 치안까지 맡는 헌병 경찰 제도가 그 핵심이었다. 헌병 경찰은 재판 없이 벌을 내리는 즉결 처분권을 가졌고, 1912년 제정된 조선 태형령은 한국인에게만 태형을 가할 수 있게 했다.
위압은 일상까지 파고들었다. 학교 교원과 일반 관리마저 제복을 입고 칼을 차게 했다. 신문·집회·결사의 자유는 박탈되어 한국인이 발행하던 신문 대부분이 폐간되었다. 공포로 저항의 싹을 누르는 방식이었다.
경제 기반을 빼앗다
일제는 통치와 동시에 경제 수탈의 틀을 짰다. 1910년부터 1918년까지 벌인 토지 조사 사업은 정해진 기간 안에 토지 소유를 직접 신고하게 하는 기한부 신고제였다. 절차가 복잡하고 기한이 짧아 신고하지 못한 토지는 총독부로 넘어갔고, 이렇게 확보된 땅은 동양 척식 주식회사 등을 통해 일본인에게 넘겨졌다. 많은 농민이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1910년 공포된 회사령은 회사를 세울 때 총독의 허가를 받게 했다. 한국인의 자본과 산업이 자라는 것을 막으려는 조치였다. 여기에 어업령·삼림령·광업령 등이 더해져 바다와 산림, 지하자원까지 일제의 통제 아래 놓였다.
저항을 짓밟다
비밀 결사로 국권 회복을 꾀하던 신민회는 1911년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무너졌다.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를 조작해 수많은 민족 운동가를 잡아들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억압 속에서도 국내외의 독립 의지는 꺼지지 않았고, 그 열망은 1919년 3·1 운동으로 터져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