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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정부, 대한민국을 선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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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범위의 짧은 정리예요. 아래 본문은 여기에 배경과 결과를 더해 넓힌 것이에요.

3·1 운동은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을 하나로 이끌 지도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다. 그 결과 국내외에 세워진 여러 임시 정부가 통합되어, 1919년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자리 잡았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이 주권을 가지는 민주 공화제를 내세운 정부였다.

조직과 활동

임시 정부는 입법·행정·사법의 삼권 분립 체제를 갖추었다. 국내와의 연락을 위해 비밀 행정망인 연통제와 통신 기관인 교통국을 두었고, 독립 공채를 발행하고 애국금을 모아 자금을 마련했다. 기관지 독립신문을 펴내 소식을 알렸으며, 외교를 중시하여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보내고 미국에 구미 위원부를 두어 독립을 호소했다.

위기와 재정비

연통제와 교통국이 일제에 발각되고 외교 노선의 성과가 부진해지면서 임시 정부는 어려움에 빠졌다. 1923년 국민 대표 회의가 열렸으나 정부를 새로 세우자는 창조파와 고쳐 쓰자는 개조파가 맞서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침체를 딛고 김구는 한인 애국단을 조직해 활로를 열었다. 1932년 이봉창의 일왕 폭탄 투척과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는 침체된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고 중국의 지원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

3·1 운동은 만세 소리가 전국을 덮었는데도 그것을 하나로 묶어 낼 지도부가 없다는 사실을 함께 드러냈다. 운동이 잦아든 뒤 국내외에서 임시 정부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동시에 일어났고, 그 결과가 1919년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다.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왕이 아니라 국민이 주권을 가진다고 선언한 정부였다.

세 곳의 정부가 하나로

1919년 봄 임시 정부는 세 곳에 섰다. 연해주에서는 대한 국민 의회가, 서울에서는 한성 정부가, 중국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각각 조직되었다. 같은 목표를 가진 정부가 셋이라는 것은 곧 힘의 분산이었으므로 통합 논의가 바로 시작되었다.

그해 9월 세 정부는 하나로 합쳐졌다. 정부의 위치는 외교 활동에 유리한 상하이로 하고, 국내에서 선포된 한성 정부의 법통을 잇는 형식을 취했다.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가 선출되었다. 앞서 4월에 공포된 임시 헌장은 첫 조항에서 대한민국이 민주 공화제임을 밝혔는데, 이 한 줄이 임시 정부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이다.

국내와 이어진 끈

임시 정부는 입법 기관인 임시 의정원, 행정 기관인 국무원, 사법 기관인 법원을 두어 삼권 분립의 형태를 갖추었다. 나라 밖에 있는 정부였으므로 국내와 연결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밀 행정망인 연통제와 통신 기관인 교통국을 두어 국내의 소식과 자금을 받았다.

자금은 독립 공채를 발행하고 애국금을 모아 마련했다. 기관지 독립신문을 펴내 독립운동의 소식을 알렸고, 사료 편찬소를 두어 한국사 자료를 정리했다. 미국에서는 교민 단체들이 성금을 모아 보냈다.

외교로 호소하다

초기 임시 정부는 외교에 큰 기대를 걸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후 처리를 논의하는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보내 독립 청원서를 냈고, 미국 워싱턴에는 구미 위원부를 두어 한국 문제를 국제 여론에 알렸다.

그러나 열강은 식민지 문제를 다룰 뜻이 없었다. 승전국인 일본의 지배를 문제 삼을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외교로 독립을 얻겠다는 노선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무장 투쟁을 앞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국민 대표 회의와 분열

1921년 무렵 연통제와 교통국이 일제에 발각되어 국내와의 연결이 끊겼다. 자금이 마르고 외교 성과도 없는 가운데, 이승만이 앞서 국제 연맹에 한국을 위임 통치해 달라는 청원을 냈던 사실이 알려져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독립운동의 방법을 두고 노선이 갈린 것이다.

1923년 상하이에서 국민 대표 회의가 열렸다. 임시 정부를 해체하고 새 정부를 세우자는 창조파와 조직을 고쳐 쓰자는 개조파가 맞섰고, 회의는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끝났다. 많은 인사가 상하이를 떠났다. 1925년 임시 정부는 이승만을 탄핵하고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뽑았으며, 이후 권력을 한 사람에게 모으지 않는 국무령제와 국무위원제로 체제를 바꾸었다.

한인 애국단

침체를 깨뜨린 것은 의열 투쟁이었다. 김구는 1931년 한인 애국단을 조직했다. 1932년 1월 이봉창은 도쿄에서 일왕의 행렬에 폭탄을 던졌고, 같은 해 4월 윤봉길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군 전승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수뇌부를 살상했다.

윤봉길의 의거는 국제적으로 크게 보도되었고, 그때까지 한국 독립운동에 소극적이던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임시 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대신 일제의 추적이 심해져 임시 정부는 상하이를 떠나야 했다. 이후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다 1940년 충칭에 정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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