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 투쟁으로 일제에 맞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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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과 청산리
1920년, 홍범도가 이끈 대한 독립군은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어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군과 홍범도 부대 등 연합 부대가 청산리 일대에서 벌인 청산리 대첩은 독립 전쟁 사상 최대의 승리였다. 이에 일제는 간도의 한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간도 참변으로 보복했다.
시련과 재정비
밀산으로 집결한 독립군은 대한 독립 군단을 꾸려 러시아령으로 이동했으나,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만주로 돌아온 독립운동 세력은 참의부·정의부·신민부의 3부를 세워 동포 사회를 다스리며 무장 투쟁을 이어 갔다. 일제와 만주 군벌이 맺은 미쓰야 협정은 이러한 활동을 옥죄었다.
한중 연합 작전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한국인과 중국인은 힘을 합쳤다. 지청천이 이끈 한국 독립군은 쌍성보 등에서, 양세봉이 이끈 조선 혁명군은 영릉가 등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만주에서는 항일 유격대가 동북 항일 연군으로 이어져 국내 진입 작전인 보천보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3·1 운동의 맨몸 시위가 총칼에 짓밟히는 것을 본 독립운동가들은 무장한 군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국내에서는 군대를 기를 수 없었으므로 그 무대는 한인이 많이 사는 만주와 연해주가 되었다.
간도에 선 군대
1910년대부터 국외로 옮겨 간 독립운동가들은 한인 사회를 기반으로 학교와 단체를 세웠다. 서간도 삼원보에서는 신흥 무관 학교가 독립군 지휘관을 길러 냈다. 3·1 운동 이후 이 기반 위에 무장 단체들이 잇따라 조직되었다.
북간도에서는 대종교 계열이 북로 군정서를, 서간도에서는 임시 정부와 연결된 서로 군정서를 세웠다.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을 비롯한 여러 부대가 국경을 넘어 일제의 경찰서와 군 시설을 공격했다.
봉오동과 청산리
1920년 6월 일본군이 독립군을 소탕하려 국경을 넘어 왔다.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은 최진동·안무의 부대와 힘을 합쳐 봉오동 일대에 매복했다가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해 10월 일본군은 훨씬 큰 병력을 동원했다.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군과 홍범도 부대를 비롯한 연합 부대는 청산리 일대의 험한 지형을 이용해 백운평과 어랑촌 등에서 엿새 동안 싸워 승리했다. 독립 전쟁 사상 가장 큰 승리로 꼽힌다.
승리 뒤의 보복
패배한 일제는 간도의 한인 마을로 보복의 화살을 돌렸다. 1920년 가을부터 이듬해까지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학살했다(간도 참변). 독립군을 기르던 한인 사회 자체를 없애려 한 것이다.
독립군 부대들은 근거지를 잃고 북만주 밀산에 모여 대한 독립 군단을 꾸린 뒤 러시아령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1921년 무장 해제 요구를 둘러싼 충돌로 큰 피해를 입었다(자유시 참변). 만주와 연해주의 무장 투쟁은 한동안 힘을 잃었다.
3부와 미쓰야 협정
흩어진 세력은 만주로 돌아와 1920년대 중반 참의부·정의부·신민부를 세웠다. 이 셋은 단순한 군대가 아니라 한인 동포 사회에서 세금을 걷고 학교를 운영하는 자치 정부의 성격을 함께 가졌다. 군정과 민정을 겸한 조직이었다.
1925년 조선 총독부는 만주 군벌과 미쓰야 협정을 맺었다. 만주 당국이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체포해 일제에 넘기고 그 대가를 받는 내용이었다. 활동 무대가 곧바로 좁아졌고, 3부는 통합을 모색했으나 완전한 하나가 되지는 못했다.
만주 사변 뒤의 한중 연합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사정이 달라졌다.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한국인과 중국인이 손을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주 각지에서 한중 연합 부대가 만들어졌다.
지청천이 이끈 한국 독립군은 중국군과 연합해 쌍성보와 대전자령에서 싸웠고, 양세봉이 이끈 조선 혁명군은 영릉가와 흥경성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만주에서 활동한 항일 유격대는 뒤에 동북 항일 연군으로 이어져, 1937년에는 국경을 넘어 함경남도 보천보를 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일제가 만주 지배를 굳히면서 이곳에서의 무장 투쟁은 점점 어려워졌다. 많은 세력이 중국 본토로 옮겨 새로운 연합 전선을 모색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