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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정리 아카이브

식민지 교육에 저항하고 이념을 넘어 단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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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범위의 짧은 정리예요. 아래 본문은 여기에 배경과 결과를 더해 넓힌 것이에요.

6·10 만세 운동

1926년 순종의 인산일을 기해 학생과 사회주의 계열, 천도교 세력이 만세 시위를 준비했다. 사전에 발각되어 계획의 상당 부분이 무산되었지만, 학생들이 거리로 나서 만세를 외쳤다. 이 운동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함께 움직일 수 있음을 보여 주어 이듬해 신간회 결성의 밑거름이 되었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

1929년 광주에서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 사이의 충돌을 계기로, 그동안 쌓여 온 식민지 차별 교육에 대한 분노가 터져 나왔다. 시위는 광주를 넘어 전국으로 번졌고, 신간회가 진상 조사단을 보내 지원했다. 3·1 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의 민족 운동이었다.

배움으로 맞서다

일제의 교육은 한국인을 낮은 수준의 노동력으로 묶어 두려는 것이었다. 이에 맞서 곳곳에서 야학과 강습소가 문을 열어 한글과 민족의식을 가르쳤다. 배움 자체가 저항의 한 방식이었다.

1920년대 후반의 민족 운동에서 앞줄에 선 것은 학생이었다. 학교는 일제가 식민지 통치에 쓸 사람을 기르려고 만든 곳이었는데, 바로 그곳에서 차별을 가장 직접적으로 겪은 세대가 자랐기 때문이다.

차별이라는 땅

1911년의 제1차 조선 교육령은 한국인 보통학교를 4년으로 정했다. 일본인 학교는 6년이었다. 3·1 운동 뒤 1922년 제2차 교육령으로 수업 연한이 6년으로 늘고 일본인과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지만, 학교 수와 시설, 상급 학교로 갈 기회는 여전히 크게 달랐다.

수업에서는 일본어가 국어로 가르쳐지고 한국사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일본인 교원의 차별과 체벌도 일상이었다. 학생들은 비밀 결사를 만들고 동맹 휴학으로 맞섰다. 1920년대에 학교에서 일어난 동맹 휴학은 수백 건에 이른다.

6·10 만세 운동

1926년 순종이 세상을 떠났다. 7년 전 고종의 장례일에 3·1 운동이 일어났던 만큼 인산일은 다시 대규모 시위의 기회로 여겨졌다. 사회주의 계열과 천도교 세력, 학생 단체가 각각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지도부가 검거되었다. 6월 10일 인산일에 거리로 나선 것은 학생들이었다. 장례 행렬을 따라가며 격문을 뿌리고 만세를 외쳤고 수백 명이 붙잡혔다.

규모로 보면 3·1 운동에 미치지 못했지만 남긴 것이 있었다.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같은 목표로 함께 준비했다는 사실이다. 이 경험이 이듬해 신간회가 만들어지는 밑거름이 되었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

1929년 10월 나주역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한 일이 있었다. 이를 두고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이 충돌했고, 경찰과 학교가 일본인 학생을 편들자 쌓여 있던 분노가 터졌다.

11월 3일 광주의 한국인 학생들이 일제히 거리로 나섰다. 시위는 광주에 머물지 않고 전국으로 번져 이듬해 봄까지 이어졌다. 참가한 학교가 190곳을 넘고 학생이 5만 명을 웃돌아, 3·1 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의 민족 운동이 되었다.

학생들의 요구는 단순한 사과가 아니었다. 식민지 차별 교육의 철폐와 한국인 본위의 교육, 나아가 식민 통치 자체에 대한 반대로 나아갔다. 신간회는 진상 조사단을 보내 이를 전국 운동으로 넓히려 했고, 그 과정에서 조직이 큰 타격을 입었다.

배움으로 맞서다

학교에 갈 수 없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 빈자리를 야학과 강습소가 메워, 한글과 셈을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함께 심었다. 1920년대 말부터는 신문사가 나섰다. 조선일보는 문자 보급 운동을, 동아일보는 브나로드 운동을 벌여 방학 때 학생들을 농촌으로 보내 한글을 가르쳤다.

일제는 1935년 이런 계몽 운동을 금지했다. 글을 읽게 되는 것 자체가 통치에 위험하다고 본 것이다. 배움이 저항의 한 방식이었다는 사실을 일제가 먼저 인정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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