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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정리 아카이브

사회 모습이 변화하고 대중 운동이 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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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범위의 짧은 정리예요. 아래 본문은 여기에 배경과 결과를 더해 넓힌 것이에요.

차별에 맞선 사람들

1923년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가 세워져, 오랜 신분 차별에 시달려 온 백정이 스스로 평등을 요구하는 형평 운동을 벌였다. 방정환을 중심으로 한 소년 운동은 어린이를 인격체로 존중하자며 어린이날을 만들었고, 근우회 등은 여성의 권리 신장을 위해 힘썼다.

일하는 이들의 저항

농촌에서는 소작료 인하 등을 요구하는 소작 쟁의가, 도시에서는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 쟁의가 이어졌다. 전라도 암태도의 소작 쟁의와 1929년 원산 총파업은 대표적인 사례로, 생존권 투쟁이 곧 민족 운동과 이어져 있었음을 보여 준다.

바뀌어 가는 일상

도시가 커지고 신문·잡지가 널리 읽히면서 사람들의 생활 모습도 달라졌다. 새로운 문물을 좇는 이들이 등장하는 한편, 대다수 민중의 삶은 여전히 고단했다. 근대의 화려함과 식민지의 그늘이 함께 있던 시기였다.

1920년대에는 독립운동과 나란히 사회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신분 차별을 받는 사람, 어린이, 여성, 소작인, 노동자가 각각 자기 이름으로 목소리를 냈다. 식민지에서 권리를 요구하는 일은 그 자체로 통치와 부딪히는 일이었으므로 이 운동들은 민족 운동과 이어졌다.

형평 운동

1894년의 갑오개혁으로 법적 신분제는 사라졌지만 차별은 남았다. 소를 잡는 일에 종사했던 백정 출신은 호적에 따로 표시되고 학교 입학과 혼인에서 거부당했다. 1923년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가 세워진 것은 이 차별을 스스로 끝내려는 움직임이었다.

형평사는 이름 그대로 저울처럼 평등한 사회를 내세웠다. 전국에 지사를 두고 차별 사건에 항의하고 소송을 지원했으며 청년 운동과 농민 운동과도 연대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내부 노선 갈등으로 1930년대 중반 이후 성격이 크게 달라졌다.

어린이와 여성

방정환을 중심으로 한 소년 운동은 어린이를 어른의 소유물이 아닌 독립된 인격으로 대하자고 주장했다. 1921년 천도교 소년회가 조직되고 1922년 어린이날이 선포되었으며, 1923년에는 잡지 「어린이」가 나왔다. ‘어린이’라는 말 자체가 이 운동을 거쳐 널리 쓰이게 되었다.

여성 운동은 1927년 근우회로 모였다. 근우회는 여성의 단결과 지위 향상을 내세우며 조혼과 인신 매매 반대, 문맹 타파, 여성 노동자의 임금 차별 철폐를 요구했다. 신간회의 자매 단체로서 민족 운동과 여성 운동을 함께 밀고 나갔다.

소작 쟁의와 노동 쟁의

농촌에서는 소작료 인하와 소작권 보장을 요구하는 소작 쟁의가, 도시에서는 임금 인상과 노동 시간 단축을 요구하는 노동 쟁의가 이어졌다. 1924년 조선 노농 총동맹이 결성되어 이들을 묶었고, 1927년에는 노동과 농민 조직으로 나뉘어 각각 전국 조직을 갖추었다.

전라남도 암태도에서는 1923년부터 1년 넘게 소작인들이 지주에게 맞섰다. 수확의 7할을 넘게 거두어 가던 소작료를 4할로 낮추라는 요구였고, 단식과 법정 싸움까지 벌인 끝에 인하를 받아 냈다. 소작인이 조직을 갖추면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사례였다.

1929년 원산에서는 넉 달에 걸친 총파업이 일어났다. 한 석유 회사의 일본인 감독이 한국인 노동자를 때린 일이 발단이었는데, 원산의 노동조합들이 함께 일손을 놓아 도시의 기능이 멈췄다. 일제가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진압하면서 파업은 실패로 끝났지만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노동 쟁의로 남았다.

달라진 일상, 그대로인 삶

도시가 커지고 전차가 다니고 백화점이 들어섰다. 신문과 잡지, 유성기와 영화가 보급되면서 새로운 유행을 좇는 이들이 나타나 모던걸·모던보이로 불렸다. 서양식 옷과 단발이 도시의 풍경을 바꾸었다.

그러나 그 화려함은 얇았다. 농촌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도시 변두리에 흙과 나무로 얼기설기 지은 토막에 살며 날품팔이로 버텼다. 같은 도시 안에 근대의 진열장과 식민지의 그늘이 나란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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