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국 신민이길 강요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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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후반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한국인을 전쟁에 동원하려고 아예 민족성을 지워 버리는 통치로 나아갔다. 이른바 내선일체를 내세워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려 한 것이다.
이름과 말을 빼앗다
일제는 황국 신민 서사를 강제로 외우게 하고, 신사 참배와 궁성 요배를 강요했다.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는 창씨개명을 밀어붙였고,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없애고 우리말 사용을 금했다. 민족의 얼을 담은 언어와 이름까지 지우려 한 폭압이었다.
사람과 물자를 쥐어짜다
1938년 국가 총동원법을 만든 일제는 전쟁에 필요한 모든 것을 수탈했다. 지원병·학도병·징병으로 청년을 전쟁터로 내몰고, 국민 징용령으로 노동력을 강제 동원했으며, 여성마저 정신대 등의 이름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곡식과 놋그릇까지 공출로 빼앗아 갔다. 한반도 전체가 전쟁을 위한 병참 기지로 전락했다.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쟁을 이어 가기 위해 한국인의 노동력과 병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한국인에게 일본을 위해 싸울 이유가 없었으므로, 일제는 아예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려 했다. 민족을 지우는 통치가 여기서 나왔다.
왜 민족을 지우려 했나
일제는 내선일체, 곧 일본과 조선이 한 몸이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여기에 두 민족의 조상이 같다는 주장을 덧붙였다. 차별은 그대로 두면서 의무만 같게 하려는 논리였다.
경제에서도 한반도는 전쟁을 위한 병참 기지로 재편되었다. 앞선 시기 남쪽에 면화를 심고 북쪽에 양을 기르게 한 정책에 이어, 북부 지역에 군수 물자를 만드는 중화학 공업이 세워졌다. 한국인은 그 공장에서 낮은 임금으로 일했다.
이름과 말을 빼앗다
1937년 일제는 황국 신민 서사를 만들어 학교와 직장에서 외우게 했다. 신사에 참배하고 일왕이 사는 궁성을 향해 절하는 일이 강요되었으며 정해진 시각에 묵도를 올리게 했다.
1938년 제3차 조선 교육령은 조선어를 필수 과목에서 선택 과목으로 내렸고, 1943년의 제4차 교육령은 조선어와 한국사 교육을 아예 없앴다. 학교 이름도 일본과 같게 바꾸었다.
1940년부터는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하는 창씨개명을 밀어붙였다. 신고하지 않으면 학교 입학과 배급, 관청 일에서 불이익을 주었다. 같은 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폐간되어 한국인이 한국어로 내는 신문이 사라졌다.
사람을 끌어가다
1938년 일제는 국가 총동원법을 한국에도 적용했다. 사람과 물자를 전쟁에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게 하는 법이었다. 이듬해 국민 징용령이 내려져 수많은 한국인이 일본과 사할린, 남양 군도의 탄광과 군수 공장으로 끌려갔다.
병력 동원은 단계적으로 강해졌다. 1938년 지원병제로 시작해 1943년 학도 지원병제, 1944년 징병제로 이어졌다. 이름은 지원이었지만 할당량이 내려오고 압박이 따랐으므로 사실상 강제였다.
여성도 동원되었다. 근로 동원의 이름으로 공장에 배치된 이들이 있었고, 수많은 여성이 속거나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로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 국가가 조직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물자를 쥐어짜다
1940년 산미 증식 계획이 다시 시작되고 미곡 공출제가 실시되었다. 정해진 양의 쌀을 강제로 내놓게 하고 배급으로 되돌려 주는 방식이었으므로, 무엇을 얼마나 먹을지도 관청이 정했다. 금속류 회수령으로 놋그릇과 숟가락, 절의 종까지 거두어 갔다.
감시는 마을 단위로 내려왔다. 국민 총력 조선 연맹 아래 열 집 안팎을 묶은 애국반이 조직되어 공출과 근로 동원, 참배 참여를 서로 확인하게 했다. 일상이 전쟁 행정의 마지막 단위가 된 것이다.
남은 문제
광복이 이 문제들을 끝내지는 못했다.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임금과 유골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1991년 김학순의 공개 증언으로 비로소 세상에 드러났다. 피해자들이 직접 말하기 전까지 기록만으로는 밝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 통치의 성격을 말해 준다.